<천궁시 각성편 2화>
가을이라 그런지 준은 점점 하루가 빨라지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7시지만 벌써 하늘에는 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주변에는 가로등의 불빛이 수놓아 지기 시작했다.
장을 보고 집에 가서 저녁을 보내기엔 시간이 늦을 것 같아 준 일행은 주변에 있는 라멘집으로 가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동양식 가게로 꾸며진 가게는 팔을 흔드는 고양이나 애니메이션 피규어가 가게를 꾸미고 있었고 그와 별개로 나무의 중후함이나 주황등의 아늑함으로 인해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 달 전에는 인스턴트 면 음식을 질릴 정도로 먹어서 그런지 돈주고 먹기 아까운 느낌이야.”
“그러게 그 이후로 면 음식을 먹는 건 오랜만이네.”
“일주일에 4번은 먹었으니 질릴 만하지. 것보다 너도 라멘 안 시켰잖아.”
준이 라멘 집에 와서 차슈덮밥이나 먹을 거면 여길 왜 오자고 한 거냐 물어봤지만 메리는 당당하게 똑바로 쳐다보며 즉답했다.
“여기가 가까웠으니까.”
원칙주의자인 척 하면서 이런 건 또 유도리를 잘 보여준다.
“그치만 라멘은 이제 질리는걸.”
“........”
여기 덮밥을 시킨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 에리는 시킨 음식은 카레로 이젠 라멘집과의 연관조차 희미해 지고 있었다.
것보다 카레는 동남아시아 음식 아니었나.
왜 이런 집에서 카레도 파는 거지.
“그래도 덕분에 **락 쓰는 법은 배워서 재미는 있었어. 내기로 비비탄 구슬 옮기기 했을 때 별 이상한 짓도 했잖아.”
(*후기 참조 /**락 -> Chopsticks)
“페드의 꼼수는 눈부셨지.”
비비탄을 한줄로 세워놓고 **락을 양쪽으로 눕혀 가운데 끼우는 발상은 준이 지금 생각해도 신박했다. 힘 조절을 못해서 다 튀어나가기도 했지만 어쨌든 3등이나 했으니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한 결과였다.
참고로 1등은 준 2등은 에리였다. 이후 동양인의 문화 행패라면서 그 내기는 한동안 다시 꺼내진 못했지만 꼴등한 메리는 분했는지 피나는 연습 끝에 결국 리벤지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었다.
그게 단 2달 전 이야기였다. 2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오래전 추억같이 느껴졌다. 갑자기 먹먹해진 가슴을 푸는 김에 매운 빨간 라멘의 국물을 숟가락으로 퍼 마셨지만 역시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좀 더 맵게 해달라 할 걸 그랬나.”
“넌 너무 맵게 먹어.”
“오빠, 그러다 이상해져.”
“솔직히 그 컵라면 정도는 되야 매운 거지. 안 그래?”
그러자 메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 했다. 그 웃음은 친절에서 나오는 미소가 아닌 분노의 미소라는 걸 오랫동안 지냈던 준은 알 수 있었다.
“매운 거 먹더니 또 정신을 못차리지? 오랜만에 냉찜질 당하고 싶은 거지?”
“아, 아뇨...”
당시 일행이 천공시에 오고 얼마 안가 마트에 갔었던 일이었다. 준이 고향에서 먹었던 컵라면을 발견해 기쁜 나머지 사서 둘에게 먹였는데, 둘 모두 하루 종일 화장실을 왕복하게 된 것 이다.
덕분에 둘은 컵라면에 불 뿜는 닭이 보이기라도 하면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지 않을 정도의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당연히 준도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 하루 종일 냉찜질을 당했어야 했다.
“그러니까 덜 매운것도 있다니까. 그 분홍색을 사면 오히려 달-”
“죽.어.도.싫.어. 이 생강을 코로 밀어버리는 수가 있어.”
“넵.”
살기까지 뿜는 메리를 말릴 자신이 없어 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에리를 바라보았다.
최근 준을 가장 잘 따르는 에리라면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에리는 카레그릇으로 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고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준은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뒤로 돌리려던 찰나, 에리의 뒤에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아 고개를 다시 돌렸다.
하지만 준이 바라본 곳은 음식을 다 먹고 나가는 손님이 계산하고 있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 아는 사람이야?”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준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락을 들었다.
최근 준은 그런 환영이 자주 보여 내심 정신병이라도 생긴 건가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마리아 박사에게 한번 상담을 해봤지만 퇴역 군인들 같이 극단적인 환경에 일어나는 후유증일 수도 있다며 안정제 외에는 특별한 조치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환영의 등장빈도가 심해지다 보니 준은 내심 불안했다. 익숙한 모습이기라도 하면 원인을 가늠이라도 하겠지만 전혀 낯선 모습의 형태라 종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경단 머리를 한 것 같은 모습의 안대를 한 여자아이 환영.
대체 본적도 없는 그런 모습의 여자아이의 환영이 왜 그의 눈에 비치는 건지 준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준과 일행은 장을 본 것들을 정리하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준은 에리를 재운 뒤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나와 거실 TV옆에 놓인 로봇을 쳐다보았다.
「Eins-31」 별칭 「에삼이」라고 불리는 로봇은 준 일행을 지옥에서 비행기를 조종해 탈출시켜준 은인이었다.
그런데 **트리카 섬을 빠져나와 인근 공항에 비상착륙 한 뒤엔 에삼이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해 버린 것이다.
방전이라도 된 싶어 충전을 시도해 봤지만 그럼에도 작동하지 않았고,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일행은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원래라면 네겐트로피 회사에 연락해 수리를 의뢰하는 게 맞겠지만 착륙 직전 에삼이가 남긴 말로 방치할 수밖에 없었 때문이다.
『잘 들어. 저곳에 도착하고 나면 너희들은 능력에 관해 일체 숨기고 있어야해. 그리고 날 절대 네겐트로피 본사에 수리를 맡기는 것도 안 되고. 내가 다시 깨어날 때 절.대. 너희들이 초능력자인 걸 들키면 안 돼. 알았지!』
그러고는 정지한 에삼이는 이후 우리들의 진위 여부를 위해 천공시에서 맡겨져 네겐트로피 직영점 기술자를 통해 데이터 메모리를 열람해 보았다.
하지만 데이터에 남은 영상과 정보라곤 준 일행이 탈출하기 직전의 영상과 환경 데이터 정도였고 그 외 남은 데이터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별 탈 없이 진위여부가 증명된 준 일행은 천공시에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네겐트로피에서는 비슷한 새 재품을 선물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대신 고장 난 에삼이를 받는 것을 요청한 것이 허락되어 이렇게 데려다 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 넌 대체 언제 깨어날 생각이야.”
재수 없는 기계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긴 할까 하는 아쉬움에 머리를 중지로 튕켜봤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 뿐이었다. 대신 목에 차가운 캔의 감촉이 느껴져 화들짝 놀란 준이 뒤돌아보자 메리가 웃으며 맥주캔을 건네주었다.
“뭐야, 웬일로 네가 술을 권하네.”
“원래 노동자들은 식후 술 아니었어?”
“대학원생 다음은 노가다 꾼이냐.”
그러고는 발코니로 향하는 메리를 준도 뒤따라갔다. 발코니에서 보인 바깥풍경은 꽤나 화려했다.
도시에서 비추는 불빛들과 오가는 차의 해드라이트들이 비춰져 야경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예뻤다. 하지만 거주용
자택이라는 측면으로 보았을 때 너무 밝은 나머지 부담스러운 감도 있었다.
덕분에 사람이 거주하기엔 불편하여 임대가 없던 이곳을 준과 일행이 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집 또한 신성의약에서 제공해 줬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맥주캔을 따고 홀짝이기 시작한 메리를 바라보며 준도 발코니에 기대 맥주캔을 땄다.
“연락 받았어?”
“뭘?”
“... 아트 어머니께서 이번 주 주말에 면회 오시겠대.”
“........”
아트의 가족에 대해선 솔직히 준도 들은 바가 많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와 집사였던 분, 그리고 작은 아버지 모두 붕괴에 휩쓸려 돌아가시고 집에는 어머니만 남았다 정도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트는 매우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서둘러 돌아가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를 도와 집안을 이어가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그 때문에 마지막엔 준과 일행을 배신하고 다시 후회하며 그들을 구해주다가 결국 마지막엔 자신을 희생하고 말았다.
솔직히 준은 아트를 바보 같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스스로 견디지도 못할 짓을 저지르고 후회하다가 본전도 못 찾은 샘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아트를 그리워하는 자신은 더 멍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 솔직히 그분을 어떻게 뵈야 될지 모르겠어.”
“메리?”
“나중에 어떻다고 해도... 결국 우리를 배신했었잖아. 그 때문에 우리 모두 위험했었고. 페드도 잃었고. 그랬는데.”
메리가 다시 한 번 맥주를 홀짝이더니 뒤이어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어째서 그 녀석을 탓할 수가 없을까. 그 애가 했던 짓을 용서할 순 없는데... 미워할 수도 없어. 그러다 보니까. 아트의 어머니를 어떻게 되야 될지 모르겠어.”
준은 손에든 맥주를 홀짝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모두 꺼졌던 **트리카 섬에 비해 천공시의 하늘은 밋밋하기만 했다.
별빛이 모두 땅에 꺼지기라도 한 마냥 눈앞의 거리는 밝은데 하늘은 어둡기만 했다.
“그럼 나 혼자 가도 되니까 너는 그냥-”
“이 바보야.”
“악!!”
메리가 겨드랑이를 꼬집자 준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살짝 꼬집었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아풀수가 있지 놀라는 찰나 메리가 이번엔 말로 준을 찔러댔다.
“니가 혼자 나가고 난 집에서 기다리면 내가 마음이 편할 거 같아? 집에서 혼자 마음이 답답해 지는 건 어떻게 할 건데!”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정말이지.”
메리가 ‘어쩌다 이런 애 한테-’ 라면서 말을 흘렸지만 준은 그게 더 마음의 비수가 되었다. 그야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남자친구가 이렇게 못나서야 쓰겠어?”
“이런 남자친구도 좋다고 받아준 건 너거든.”
준이 곧바로 반박하자 메리에게 가볍게 한 대 더 맞아버렸다. 그러고는 기분이 풀렸는지 다시 임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갈 거야. 가서 만나 부딪혀야 내 자신에게 떳떳해지지.”
“넌 가끔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거 같아.”
“그.러.니.까.”
이어서 메리가 준의 팔을 당긴 메리는 곧바로 준에게 머리를 기댔다. 얼떨결에 어깨를 빌려준 준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한지 곧바로 자세를 잡아 받아주었다.
“너가 좀 잘 받쳐 주라고.”
“정말 어려운 말씀을 하시네요. 여자친구님.”
준이 난처해하며 대답했지만 뭐가 웃긴지 메리는 큭큭 거리며 준에게 계속해서 기대고 있었다.
“그 아이들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겠지?”
“꼭 그럴 필욘 없어.”
“하지만 너무 무책임하잖아.”
“그런건 우리에게 너무 무거워.”
준이 왼손으로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섬에서의 메리였으면 애 취급 하지 말라며 준의 손을 쳐냈겠지만 지금의 메리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아마 이게 이게 그녀의 본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엄격하게 밀어 붙이고 그러면서 스스로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그런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
그런 의미에서 준의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특별히 잘난 거 하나 없고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뒤에서 떠받쳐 주는 것 밖에 못하는 인간.
그 섬에서부터 오직 준만이 바뀌지 못하고 있었다.

붕괴 업데이트 한거 잠깐 하고 와야지!!
라고 말한지 어느덧 4시간.
무서운 게임...
**락 -> Chopsticks
그리고 대체 Chopsticks을 한글로 못쓰게 하는걸까요.


